“美 공화당 조직 이끈다” ‘코리아 파수꾼’의 꿈 & 야망

[중앙일보] 입력 2008.06.25 13:04 / 수정 2008.06.25 14:10

특파원리포트 북파공작원 출신 임청근 한미동맹협의회 총재

임청근 한미동맹협의회 총재 누구인가?                                                                               

배재중 졸업 앞두고 전쟁에 휘말린 5대독자

임청근 한미동맹협의회 총재는 1932년 3월 서울 서대문에서 부호의 아들인 임복일 씨와 이부전 여사 사이에 5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화여전 출신의 엘리트로 학생시절 서울 시내 16개 신식 학교를 대표해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기도 한 재원이었다.

 

초등학교 때 부평으로 이주한 임 총재는 기독교도인 어머니의 권유로 미션스쿨인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을 1년 앞둔 18세에 6·25 전쟁을 맞자 임 총재는 부평에 주둔하던 미군부대로 들어갔다. 5대독자인 그를 살리려면 군대가 가장 안전하다는 어머니의 판단 때문이었다.

 

“미군 공작대에 배속돼 있다 1·4 후퇴 당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공작대는 동래에 본부, 후암동에 사격장을 두고 있었죠. 어느 날 밤 갑자기 ‘부두에 나가 LST를 타라’는 명령이 내려졌지요. 한참 뒤 배가 알지도 못하는 해안가에 멈추고, 우리는 인근 산봉우리로 올라갔어요. 거기서 미군들이 신무기인 M2 소총과 BRA 기관총을 나눠주며 ‘무조건 쏘라’고 명령하는 거예요. 한참을 쏘니까 귀대명령이 떨어져 부산으로 돌아왔어요. 알고 보니 미군이 인천에 다시 상륙하는 작전을 계획했는데, 그것을 위장하려고 원산에 우리 북파공작원들을 침투시켜 ‘쇼’를 한 것이었습니다.”

 

임 총재가 소속됐던 공작대는 1951년 3월 서울 재수복 당시 가장 먼저 서울에 진입해 20일간의 시가전 끝에 이태원 한 초등학교 터에 주둔했다. 당시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탄을 맞았지만 빗겨 맞아 중상을 면했다고 한다. 임 총재는 그 후 부평 집을 찾아갔다 다시 군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전쟁 통에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죠. 집에 있어봤자 뾰족한 일자리도 없었고요.”

 

한국전쟁 통에서 너무 살기 힘들었던 임 총재는 북파공작대로 돌아가 20여 차례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하루 2~3시간 이상 자본 일이 드물 정도로 고된 업무였다고 한다.

 

그 뒤 임 총재는 이들을 대신해 신원이 확실한 국내 청년 80명을 선발해 미군(유엔군)과 한국군을 연결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이들이 카투사(KATUSA)의 전신인 셈이다.

 

한국 육군 정보국과 미군 중앙정보국(CIA) 을 넘나들며 활동한 임 총재는 어느 날 김창룡 당시 특무대장에게 발탁돼 미8군 체육관 설립 멤버가 된다.

 

타고난 운동신경을 가진 그를 김 대장이 눈여겨본 것. 임 총재는 펠릭스라는 미군 장교에게 권투를 배운 뒤 미군 체육관이 개최한 권투대회마다 족족 우승하면서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1958년 미군을 떠나 한국군에 정식 입대한 임 총재는 계속 공작 업무에 종사하면서 당시 미8군이 국내에 처음 들여온 컴퓨터 설치작업에도 참여한다. IBM이 주기종이었다고 한다.

 

이때 부대 안에서 컴퓨터 키펀처로 근무하던 아리따운 여성을 만나 결혼하는데, 바로 부인 김희숙(71) 씨다. 결혼 후 임 총재는 미군 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위한 노동조합 설립에도 뛰어든다.

 

기사링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202810